인물 소개

유진 초이
유진 초이 (타이틀)
어미도 아비도 노비여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비였으나 검은 머리의 미국인인 사내. 하여, 이방인의 냉정함, 침략자의 오만함, 방관자의 섹시함을 가진 사내.

아홉 살 되던 해, 주인 나으리 김판서는 사노비인 유진의 부모를 때려죽임으로써 김씨 가문이 얼마나 세도가인지를 증명했다. 재산이 축난 건 아까우나 종놈들에게 좋은 본을 보였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유진이 기억하는 마지막 조선(朝鮮)이었다.

유진은 달리고 또 달렸다. 조선 밖으로. 조선에서 제일 먼 곳으로. 그런 유진의 눈앞에 파란눈에 금발머리를 한 서양도깨비의 배가 떠 있었다. 미국군함 콜로라도 호였다. 어디를 조국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던 사춘기였다. 바다 건너 땅에서도 밑바닥 인생이긴 마찬가지였다. 이길 때까지 싸우고 지면 다시 싸웠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이름 앞엔 늘 최초가 붙었다. 동양계 최초 미 해병대 장교 임관. 동양계 최초 미 용사훈장 수훈. 최초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대부분 차별이었다. 차별을 이겨내자 특별해졌다.

‘최유진’이 유진, 초이(Eugene Choi)가 되던 날 유진은, 자신의 조국으로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선택했다. 미·서(美西)전쟁(미국-스페인)에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건 명예로운 용사훈장과 또 다른 주둔지, 조선(朝鮮)이었다. 세력을 팽창 중인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영어와 조선말에 능통한 유진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보고서엔 금일도 조선에선 제 나라 독립을 위해 꽃 같은 목숨들이 죽어나간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조선의 주권이 어디에 있든 제 알 바 아니었다. 유진에게 조선(朝鮮)이란 제 부모를 때려죽인 나라였고, 제가 도망쳐 나온 나라였고, 양반들이 개화의 탈을 쓰고 앞다투어 매국을 하는 야만의 나라일 뿐이었다.

조선 밖으로 달려 나온 아홉 살 이후부터, 유진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 자리마다 악몽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유진은 조선으로 가는 이 걸음을 뒷걸음질이라 생각지 않기로 했다. 조선은 그저 건너야 하는 땅, 자신이 밟아야 하는 디딤돌일 뿐이었다. 유진은 결심했다. 모질게 조선을 밟고, 조선을 건너, 내 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하지만 유진은 알지 못했다. 조선에서 기다리는 자신의 운명을. 거침없이 유진을 흔들고, 유진을 건너, 제 나라 조선을 구하려는 한 여자, 애신을 만나게 될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