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개

고유림

고유림


● 18세
● 태양고 펜싱부 / 펜싱 국가대표


고유림의 유서 (19세)

지구가 멸망하는지 안 하는 진 모르겠지만 연말이다. 연말은 어쩐지 기분이 따뜻해진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예쁘고 조명도 반짝거리고 거리에서 나오는 캐롤도 듣기 좋다. 그러니까 유서를 빌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근데 진짜 멸망할 수도 있으니까 모두 살아있을 때 내일 읽어줘야지, 히히.

부모님께.
엄마 아빠. 유림이에요. 엄마는 지금쯤 분식집 문을 닫고 설거지를 하고 있겠고, 아빠는 고속도로 위에 있겠네요. 밤 운전 조심하고 있죠? 생각해보니 지구가 멸망하면 절대 안 될 거 같아. 내가 엄마 아빠 호강 시켜준다고 그랬잖아요. 아직 못 시켜준 호강이 많이 남아서 안 되겠어. 엄마는 맨날 없는 집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지만, 난 엄마 아빠랑 함께 있으면서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고생은 내가 고생 더 시켰지 뭐. 빵꾸난 펜싱 장갑이랑 재킷이랑.. 그 바늘도 잘 안 들어가는 걸 엄마가 맨날 꿰매줬잖아요. 고생 시켜서 미안했어요. 하고 많은 운동 중에 돈 많이 드는 운동 해서 그것도 미안해요. 난 엄마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아, 물론 사랑하는 건 당근이고!

지웅이에게.
난 평생 운동부로 살아서 학교는 곧 체육관이었어. 나머지 공간들은 늘 묘하게 낯설었어. 다른 인생을 사는 다른 아이들의 다른 공간. 나는 이방인이었지. 그런데 복도에서, 매점에서, 교실에서 자꾸자꾸 니가 나타났어. 너는 나에게 체육관 안과 밖의 경계를 지워준 사람이고, 학교가 얼마나 재밌는 곳인지 알려준 사람이야. 그리고 니가 데려가준 세계가 나는 정말 눈물겹도록 좋았어.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지웅아, 너를 만난 건 정말 기적이야. 오래도록 함께 하자 우리.

마지막으로 희도에게.
처음에 네가 우리 학교로 전학 왔을 때, 내가 쌀쌀맞게 굴어서 상처 많이 받았지? 미안해. 넌 내 인생 최초의 두려움이었거든. 아마 네가 전학 온 순간, 나는 예감했던 것 같아. 네가 두려워질 일이 다시 한 번 생길 거란 걸. 그래서 최선을 다해 너를 싫어했어. 역시나 예감은 적중했고, 아시안게임 이후로 언론은 우리 둘을 붙여놓길 좋아했지. 라이벌이라 부르다가 악연이라 부르다가 지들 마음대로 우릴 가지고 놀았지.

그런데 희도야. 어떻게 우리가 악연일 수 있을까. 나는 너를 이기려고 노력하고, 너는 나를 이기려고 노력하면서 우린 끝없이 강해졌지. 어떤 경기든, 가장 마지막 경기에 서 있는 사람은 너와 나였어. 그럴 때마다 우리의 결승전은 내 자부심이었고, 너에 대한 존경이었고, 나에 대한 신뢰였어. 너와 나는 칼끝을 겨누고 있었지만, 나한텐 모든 순간이 우리였어. 올림픽까지 1년 반 남았다, 희도야. 전 세계가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게 하자. 그때도 펜싱 마지막 경기는 우리 둘의 차지일 테니까. 언론이 우리를 갖고 놀았던 것처럼 그땐 우리가 언론을 갖고 놀자. 여전히 사이가 안 좋은 척해 볼까? 아니면 사랑한다고 말할까? 뭐가 됐든 생각만 해도 신나. 물론 금메달은 내가 딸 거야! 히히.

근데 희도야, 이건 너한테만 털어놓는 말인데,
나 요즘 펜싱이 잘 안 돼. 왜 안 되는지 잘 모르겠어서 더 지치는 거 같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