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개

백이진

백이진


● 22세
● 만화책 대여점 알바생 / UBS 스포츠 기자


백이진의 유서 (23세)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절절하게 믿고 있는 동생이 강요해서 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데, 동생은 지구가 멸망하길 바라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유복하고 귀여웠던 우리 막내는 한순간 낯선 친척 집 다락방 신세가 됐다.

삶이 계속되는 것보다 지구가 멸망해버리는 게 막연히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IMF는 예상보다 엄격하게 우리 집을 초토화시켰다. 엄마는 포항으로, 아빠는 군산으로 몸을 숨겼다. 빚이 옮아갈까 봐 이혼도 하셨다. 서로 극진히 사랑하시는 두 분은 요즘 하두리캠으로 눈물의 상봉을 하신다. 군대 간 지 6개월쯤 됐을 무렵, 국가는 나에게 제대를 명했다. 지금은 나라 말고 네 가정을 지키라고.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가족은, 국가가 나에게 부여한 책임이었다.

꿈은 사치였다. 아무 회사나 닥치는 대로 면접을 봤고, 결국 날 받아준 건 방송국이었다. 면접 때 신재경 앵커가 나에게 물었다. 꿈이 뭔가요. 옆에 있던 면접생들이 대답했다. 정직한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앵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사는 게 꿈입니다. 기자는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그 자질을 가지고 있어 뽑힌 거라고 나중에 신재경 선배가 말해줬다. "니가 산일건설 장남이라며? 군대는 아버지가 빼줬냐?" 스물셋에 방송국 기자가 됐더니 선배들이 비아냥대며 물었다. 생계 유지 곤란에 의한 의가사 제대라고 설명하자, "몰락한 도련님이네." 그랬다.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도련님'의 순간과 '몰락한'의 순간이 교차했다.

요즘 선배는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사실 올해처럼만 살고 싶다. 올해 나는 선배가 시키면 뭐든 다 했고, 뭐든 다 됐다. 잠복 취재할 땐 화장품 외판원이 됐다가, 경호원이 됐다. 또 아시안게임이 열리니 급히 스포츠 기자가 됐다. 나는 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나 지금은 펜싱 해설도 할 수 있다. 집에 쌓인 빚보다, 슬픔에 잠긴 가족보다, IMF보다.. 선배가 무서웠다.

제대 후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사람은 단연 나희도다. 시대도 가정도 그 애의 꿈을 짓밟았지만, 아주 멋지게 반항했다. 물론 반항의 방법은 기가 찼지만.. 어떤 무엇도 내 꿈을 방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애에게 많이 배웠다. 온 국민이 그녀를 매도하던 날, 나는 그 애도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다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 애가 만난 세상은 모두 이런 식이었겠지. 신재경 선배가 희도의 엄마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 후로 나는 희도의 비하인드 씬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 예의 없는 돌대가리가 이해가 됐다. 걔의 싸가지 없는 말솜씨를 자꾸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욕심이 생겼다. 보는 눈 없는 곳에서 희도가 흘린 땀과 부상, 외로움 같은 것들을 세상이 좀 알았음 싶었다. 펜싱에선 상대와 거리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기자도 같다. 취재원과의 거리 유지가 중요하다. 그 애와 나는 가까웠으나, 가깝지 않아야 했다. 희도와 나 사이의 거리는 몇 뼘이 정답일까. 아직 신입이라 잘 모르겠다. 지금 이 거리가 실수라면, 그건 내가 아직 신입이라서길. 날이 저물어간다. 옆에서 함께 유서를 쓰고 있는 내 동생은 정말 진지해 보인다. 뭐라고 적는 걸까.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유서를 읽어보겠다고 해야겠다.

그보다 내 동생 이현아. 지구가 멸망하는 것보다 삶이 계속되는 게 훨씬 좋은 거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보여줄게.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지. 그전에 너부터 우리 집으로 데려올게. 같이 살자, 약속해. 방금 희도에게 문자가 왔다. 또 맞춤법을 틀렸다.

외않되..라니.. 이건 정말 못 참겠다.
가서 얼굴 보고 따져야겠다.
백이현

백이현


● 15세
● 재원중


백이현의 유서 (16세)

스피노자도 오늘이 되면 사과나무 심겠다는 한가한 소리는 못할 것이다. 그는 진짜 멸망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 이 순간 나는 그보다 우월해진다. 나는 지구의 멸망을 목격하는 최초의 인류가 될 테니까.

오늘 뭘 할지 충분히 고민했고, 엄마 아빠는 너무 멀리 있어 못 보니까 형을 만나러 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데도 별수 없이 가족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약함이다. 아니, 오만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이다. 17년 인생을 종합해보자면 괜찮은 삶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겸손하게 살았다. IMF로 집이 어려워졌지만 이런 과정 또한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역경이리라.

쓰다 보니 느끼는 사실인데, 나의 글 실력이 부쩍 는 것 같다. 이 모든 건 DJ 완승 누나의 덕이다. 누나가 추천해준 책들을 읽었더니 인생에 대해 좀 알 것 같다. 완승 누나는 내 완벽한 이상형이다. 아, 지금 유명해진 DJ 완승의 해적 방송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 방송을 청취자 5명 시절부터 들었다. 이제 와서 완승 누나 좋아하는 애송이들이 우습다. 지금은 청취자 500명을 넘어간다. 내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유서를 길게 쓰고 싶지 않다.
기록은 곧 왜곡이다. 왜곡된 나를 남기고 싶지 않다.
멸망이 좀 더 가까워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간다는 건.. 무엇인가.